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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커스


에이다이 항구 터
2-1, Utsubohommachi, Nishi-ku, Osaka


오늘날
우츠보혼마치에는 원래 카이후보리가와(海部堀川)가 있었습니다. 1622년에 이주해온 소금에 절여 말린 생선을 파는 상인들이 육지에 쉽게 짐을 부리기 위하여 1624년에 건설한 것으로 아와보리가와(阿波堀川)에서 발원하여 북진하고 카이후쵸 동쪽 끝에서 직각으로 굴절하여 서쪽으로 흘러 쿄마치보리가와(京町堀)로 유입되었습니다. 이 아와보리가와에서 굴절점까지의 약 724m를 에이타이보리라고 하며 굴절점 주변을 에이타이 항구라 불렀습니다.

에이타이 항구는 우츠보의 해산물 도매상의 하역장 및 소금에 절여 말린 생선, 말린 가다랭이 포 전문 시장으로 우츠보의 중심지이기도 하였습니다. 그 중에 호시카이치 시장은 유명하여 ‘셋츠 에이쇼 즈에 타이세이’에도 ‘이 항구 주변에는 수많은 진흙으로 만든 창고가 있어 제국에서 가져오는 말린 정어리를 이곳에 수납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도매 시장을 세워 교역하고 또한 이것을 제국에 판매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에이타이 항구 터’ 비는 1953년 6월에 세워진 것으로 ‘우츠보 츠지젠노스케 산중정칠’이라 새겨져 있습니다. 부근에 쿠스나가 신사가 있고 경내에 ‘고레이노미야(御靈) 옛터’ ‘쿠스나가다이진 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원래 카이후보리가와에는 몽비바시, 에이타이바시(永代橋), 카미노바시(上之橋), 나카노바시(中之橋), 카이후바시(海部橋), 시모노바시(下之橋)의 6개의 다리가 세워졌지만 1951년 카이후보리가와를 매립함으로 모습을 감추었습니다.

 

에이다이 항구 터

자코바 어시장 터
1-8, Enokojima, Nishi-ku, Osaka


‘자코바 어시장 터’ 비가 서있는 아마가사키사카이센 도로 주변 일대는 에도시대에는 자코바쵸라 불렸습니다. 이곳에는 도지마 히가시 시장, 텐마 청과물 시장과 함께 근세 오사카의 3대 시장이라 불린 자코바 어시장이 있었습니다. 이 지역은 옛날에는 사기시마라 하였고 1615~1624년 동안 카미우오야마치(현재 츄오구)의 생선 상인들이 이곳에서 강 입구까지 멀어서 생선이 도착하여 짐을 내리는데 불편하고 여름철에는 생선이 부패될 염려가 있었기 때문에 어선 출입의 편리를 위하여 출장소를 설치한 곳입니다. 이런 이유로 많은 생선 짐꾼들이 이 부근에 군집하였고 잡어(작은 생선)를 판매하는 사람들도 모여 사기시마라는 이름은 점차 쓰이지 않게 되었고 자코바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후 자코바 시장에서는 1771년에 객주가 면허제가 되어 독점적인 지위를 인정 받게 됨으로서  1931년 11월 오사카시 중앙 도매 시장에 흡수 합병되기까지 활기를 띠었습니다.

 

자코바 어시장 터

오사카 부청 터
2-1, Enokojima, Nishi-ku, Osaka


1871년 7월 하이한치켄(廢藩置縣), 같은 해 11월의 지방 부현(府縣) 대개혁에 의해 오사카부의 관할 지역은 오사카 시가지의 4구(동, 서, 남, 북) 및 셋츠의 시마가미, 시마시모, 테시마, 니시나리, 히가시나리, 스미요시, 노세의 7군이 되었습니다. 당시의 부청은 히가시요코보리에 있었는데 건물은 좁고 부(府)행정의 중심으로 사용하기에는 부적당하였기 때문에 다음 해에 오사카부는 관민이 공동으로 비용을 부담하여 에노코시마에 신청사를 세우기로 하고 바로 착공에 들어갔습니다. 새로운 부청 소재지로서 에노코시마가 선택된 것은 이 땅이 카와구치 거류지에 가깝고 서구의 문물, 제도를 유입하는데 유리하다는 것과 장래 오사카가 서쪽으로 발전해 나갈 것이라고 예상하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신청사는 1874년 초반에 완성되었고 8일부터 6일간에 걸쳐 일반인에게 참관을 허용하였는데, 정면 현관에 4개의 대형 원기둥이 늘어서고 옥상 중앙 돔에 큰 시계를 단 이 오사카의 서양식 청사는 즉시 오사카의 신명소로 부상하고, 부민은 이 청사를 ‘에노코시마 정부’라 불렀습니다. 조폐국 관사에 있던 영국인 기사 월트스의 설계로 센푸칸(중요문화재)으로 이어지는 오사카의 본격적인 서양 건축물 이었습니다. 1926년 11월 부청은 츄오구의 현 청사로 이전하였지만 그 동안 반세기에 걸쳐 오사카 부행정은 이 청사를 중심으로 추진되었습니다. 부지 터에는 오사카 부립 산업 기술 종합 연구소가 세워져 있는데 그 뜰 앞에는 오사카시 청년 연합단이 건립한 ‘메이지 천황 성촉(聖$(Bm1(B) 구 오사카 부청’ 비석이 있습니다.

 

오사카 부청 터

쿠죠지마와 조선통신사
(마츠시마 공원 안) 1-1, Chiyozaki, Nishi-ku, Osaka


쿠죠 지역은 미나미우라라 불렸으며, ‘해변에서 거친물결이 역류하는’ 모래와 자갈밭 이었습니다. 에도시대의 칸에이년(1624~1644)동안 물 이용에 재능이 있었던 막부 관리 코우사이세키운이 이 지역의 유력자인 이케야마신베에의 협력으로 개발하였습니다. 에도시대 일본과의 선린우호에 최선을 다한 조선통신사는 일본을 12회 방문하였습니다. 수행원은 에도를 왕복하면서 오사카에서 많은 문인, 학자와 함께 교류를 즐겼습니다. 근처의 혼다 1쵸메에 소재지를 두고 있는 치쿠린지(竹林寺)에는 1764년 사절로 일본에 와서 병으로 사망한 수행원 김한중의 비도 남아 있습니다. 마츠시마 공원에 있는 기념비에는 ‘쿠죠우지마와 조선통신사’의 표제와 함께 김한중의 임종 노래와 그 죽음을 애도한 당시의 치쿠린지 주지의 노래가 새겨져 있습니다.

 

쿠죠지마와 조선통신사

아지가와 터널
2-1, Ajigawa, Nishi-ku, Osaka


아지가와와 키즈가와는 두 강 모두 배가 운항하기 위해서는 다리를 건설할 수 없었던 강이었는데, 1873년 아지가와에 카와구치 거류지의 교통편을 마련하기 위해 철교를 만들었습니다. 돛대가 높은 배가 운항할 수 있도록 다리가 선회하는 가동교(可動橋)로 자석 다리라고도 하며 오사카 명물이 되었습니다. 또한 키즈가와에는 배가 통행할 때 바닥이 튀어 오르는 도개식 가동교가 가교되었는데 이 두 다리는 1885년에 대홍수가 일어났을 때 붕괴되었습니다.

1897년에는 본래 니시쿠죠우 측에서 시설을 인도하고 있던 겐베에라는 사람이 쿠죠우신도의 서쪽 끝에 나루터를 만들었습니다. ‘아지가와의 겐베에 나루터’라 불렸고 양 연안의 상인들에게 크게 환영받았습니다. 이 무렵 아지가와에는 현 니시구 내에 7개 나루터가 있었는데 겐베에 나루터는 가장 이용자가 많았고 니시쿠죠우 사람들이 쉽게 쿠죠우로 올 수 있게 되어 쿠죠우 발전의 한 요인이 되었습니다.

쇼와 시대로 접어들면서 오사카시의 교통량이 계속 증가하여 1935년에는 아지가와즈이도(터널)가 계획되었고 1934년 9월 15일에 속칭 아지가와 터널이 완성되었습니다. 니시구 측, 코노하나구 측의 양측에서 엘리베이터로 약 17미터 강바닥까지 내려가 통로를 지나 맞은편 연안의 지상으로 나오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당시는 차량용과 보행자용 터널이 있었는데 1977년에 차량용이 폐쇄되었습니다.

하지만 보행자용 터널은 이용 빈도가 높고 터널과 함께 니시오사카의 한 명물로 지금도 시민들이 이용하고 있습니다.

 

아지가와 터널

와코우지(和光寺)
3-7, Kitahorie, Nishi-ku, Osaka


와코우지는 1698년에 호리에 신지(新地) 개발시 막부의 명에 따라 경내 1800평을 에이타이지 땅으로 정하고 치젠쇼우닌이 젠코우지(나가노켄) 본존 출현의 땅으로 사당을 건립하고 렌치잔 치젠인(蓮池山智善院) 와코우지라 칭하였다고 전해집니다. ‘셋츠 메이쇼 즈에’에 의하면 에도시대에는 본당 외에 관음당, 보문당, 애염당, 약사당, 말향지장, 염마당, 지장당, 금비라권현, 금동지장, 동당 등을 가지는 큰 사찰로 경내 한 모퉁이의 아미다 연못 중앙에는 호우코쿠카쿠라는 보탑이 있었고 경내 및 주변에는 강석(講釋)의 객석, 죠루리 자리, 대궁이나 양궁, 꼭두각시 인형극, 곡예 구경장이나 물건을 파는 가게가 늘어서 매년 2월 네한에(浬槃會)나 4월의 칸부츠에(灌佛會)는 특별히 활기찼습니다. 복권의 흥행이나 우에키이치(植木市)도 유명하였지만 ‘셋츠메이쇼즈에’에 ‘세상 사람들 사호를 읊조리며 아미다 연못을 넋을 잃고 보다’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처럼 아미다 연못의 이름으로 알려져 있고 강담, 라쿠고, 연극의 소재로서 거론되고 있습니다. 연못 주위에는 기각의 ‘아다나리토하나니고케이노사쿠라카나(仇なりと花に五戒のさくらかな)’의 구비 외에 젠코우지 여래 출현을 전하는 기념비나 가비, 구비, 위령비, 현창비 등이 세워져 있습니다.

 

와코우지

토사이나리 신사
4-9, Kitahorie, Nishi-ku, Osaka


토사이나리 신사는 토사코우치번(藩)의 창고와 거래소를 겸한 토지를 지키는 신을 모시는 신사로서 1770년에 야마시로노쿠니후쿠미이나리 신사의 분령(分靈)을 청하여 맞리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또한 1573~1592년에 창건된 것으로 1717년에 토사코우치 번주(藩主) 야마노우치토요타카가 하인에게 명하여 신을 모시는 신사를 세우게 하고 일반인의 참배를 허용하였다고도 전해집니다.

1868년에 사카이 사건이 발생했을 때, 프랑스 병사의 목을 벤 번사(藩士) 미노우라이노키치는 메이지 정부가 프랑스 공사 롯슈의 요구를 받아들여 20명에게 할복을 명하였기 때문에 이 이나리 신사 앞 경내에서 제비를 뽑아 20명의 희생자를 결정하고 다음날 사카이의 묘우코쿠지로 호송하였다고 합니다. 경내는 에도시대부터 벚꽃의 명소로 알려져 있으며 1851년에 건립된 기각에 ‘밝은 별이여! 벚꽃이 떨어질 곳을 정하지 않고 져서 산이 가발을 썼구나’라는 구비가 있습니다. 신을 모신 건물과 벚꽃 고목은 태평양 전쟁 중 공습에 의해 소실되었지만 신전도 복구하고 전쟁 후 심은 어린 벚꽃도 성장하여 심야 벚꽃 구경이 다시 재개되었습니다.

 

토사이나리 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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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카 시청 에노코시마 청사 터
1-9, Enokojima, Nishi-ku, Osaka


1889년 4월에 시세이(市制) 및 쵸무라세이(町村制)에 의해 오사카시가 설립되었으나 동시에 시행된 시세이(市制)특례에 의해 시장은 부지사를 겸임하게 되었고 시청은 부청 안에 설치되었습니다. 1898년 9월에 시세이특례 폐지에 의해 오사카시는 독립 청사의 필요성를 느끼고 1899년 12월에 부청의 북쪽의 키즈가와 히가시즈메로 시청을 이전하여 1912년 5월에 토지마 청사로 이전하기까지 소재지를 거기에 두었습니다.

 

오사카 시청 에노코시마 청사 터

카와구치 거류지 터
(혼덴 초등학교 북서쪽 모퉁이) 1-5, Kawaguchi, Nishi-ku, Osaka


오사카의 개항과 함께 카와구치쵸 일대에 외국인 거류지가 형성되었고 1868년 7월 29일에 카와구치 운상소(運上所)를 두고 거류지 26구에 대해 일본에 거주하는 외국인이 일정 대금을 지불하고 반영구적으로 토지를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얻기위한 경매가 실시되었습니다. 그 결과 영국(13구), 프랑스(2구), 독일(4구), 네덜란드(2구), 미국(4구), 벨기에(1구)에 낙찰되었고 조성에 필요한 많은 비용도 회수되었습니다. 그 후 즉시 하수도가 설치되었고 보도, 차도의 구별도 완비되고 거리에 가스등이 설치되는 등 서양 건축이 세워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최초 입주자는 상인이 대부분이었고, 소고기, 우유, 빵 등의 식료품에서 구두, 사냥모자, 양복 등 당시의 일본인에게는 신기한 상품이 매매되어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오사카 상인들은 보수적이어서 이 새로운 상품들에 대해 소극적이었으며 이 지역에 대형 선박이 출입하는데 불편했고 또 외국 상인의 횡포를 용서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외국 상인들은 점차 고베 거류지로 이전하게되었습니다. 그 후 그 터에 입주하게 된 것은 교회와 그에 부속된 학교, 병원 등이었습니다.

카와구치 거류지의 모습은, 당시 사람들에게 있어서 ‘문명개화’ 그 자체였지만 1899년에 폐지되었고, 외국인 토지 사용권리는 1942년에 모두 소실되었습니다. 이 시기의 건물은 하나도 현존하고 있지 않지만 1873년에 창건, 1915년에 재건된 카와구치 그리스도 교회의 건물이 겨우 당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혼덴 초등학교 서북 모퉁이에는 1961년 3월에 오사카시가 세운 ‘카와구치 거류지 터’ 의 현창비가 있습니다.

 

카와구치 거류지 터

오사카 시영 전철 발상지
2-8, Chiyozaki, Nishi-ku, Osaka


오사카에 시영 전철이 개통된 것은 1903년 9월 12일입니다. 오사카항의 발전을 위해 쿠죠신도의 동쪽 가장자리의 하나조노바시(현재 시영버스 쿠죠신도 정류장)를 기점으로 치쿠코우까지의 약 5킬로미터를 개통하였습니다. 단선으로 처음에는 2층 전차도 달렸고 여름에는 납량, 겨울에는 낚시 전차라고도 불렸습니다. 시가(市街) 전차는 이보다 앞선 1895년에 교토, 1903년에 도쿄-요코하마간의 개통이 있었지만, 시영에서 발족한 것은 오사카가 처음이었습니다. 이는 그 당시의 시장인 츠루하라 시장이 ‘시민의 발이 되기 위해서는, 이윤을 쫓는 민간기업이 으로써가 아닌, 공익 사업으로 해야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전통 있는 오사카의 시영 전철도 일본 만국 박람회 개최인 1959년에 전부 그 모습을 감추었습니다.

 

오사카 시영 전철 발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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